유리

2026.05.03

잠들기 전 오늘 하루 잘 살아냈다는 느낌을 받으면 잠 못 들 정도로 설렐 때가 가끔 있다. 업무에 내가 만족할 만큼 집중해서 만족스러운 결과를 만들고, 동료와 일을 멋지게 해결하고, 배달시킨 식사가 입에 잘 맞고, 던진 농담에 친구들이 답장으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를 보내고, 아부다비에서 "너 재능있어 계속 해"라며 응원을 받은 날이면 그런 느낌을 받지.

그런데 그러면 또 내 마음은 청개구리같이 불안해진다. 영화 언브레이커블에서 엘리야가 그랬듯 유리가 있다면 강철도 있다. 오늘이 강철이면 내일은 유리일 수 있다. 유리는 강철이 될 수 없고 강철은 유리가 될 수 없다. 자연주의에 대한 비판은 아무래도 매일이 강철인 사람만 할 수 있으려나. 엘리야에게 운동하라고 조언한다면 그 조언이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지.

강철의 날을 보내도 이런 생각 하는 거 보면 아무래도 나는 유리인간인가보다. 유리 유전자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유년기의 끝에서 나는 유리인간이 되었고 그건 유전자만큼이나 바꾸기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그건 꽤 괜찮다. 유리가 아니었다면 세상에 유리보다 단단한 게 얼마나 많은지 알지 몰랐을거다. 한편으론 연약함을 지녔지만 엘리야가 되지 않고 포용하게 된 나의 기질이 사랑스럽기도 해.

그럼에도 강철의 날은 의미가 크다. 한가지 상태가 지속되는 것은 불안정하다. 생태계 교란이 없으면 생물 다양성이 줄어 생태계 전체가 취약해지고, 창조적 파괴가, 몸의 면역이, 교류전기, 팽이가, 모두 정지된 상태일 때 보다 변화가 있을 때 시스템을 견고하게 만든다. 역설적으로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것보다 동적인 상태가 장기적 균형을 맞출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강철의 날을 보냈다는 이유로 내가 발전했다고 인식하는 대신 다시 유리의 날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이다. 애초에 강철이 유리보다 나은 것이라 생각한 적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