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월간 치치

2025.08.12

안녕 여러분. 문득 월간 치치를 다시 시작한지 1년이 넘었다는 것을 인지했습니다. 글 내용이 연속성이 있지도 않고 제목이 글 내용을 반영하고 있지도 않아서 어떤 글이 어떤 회차에 있는지 저도 알지 못하지만 사실 이건 의도된 것입니다. 짧은 글들을 모아 한달에 한번 온라인에 게시하는 형식만 같고 그 안에 든 글의 형식이나 내용이 모두 달라서 그 시점의 내 파편이 어땠는지 내 스스로 돌아보기 좋달까요. 그럼에도 지금까지 쓴 글모음 중 가장 좋아하는 글모음은 있는데 바로 24년 5월 입니다.

이번달에는 공교롭게도 나의 분노가 휘몰아치는 글이 많습니다. 나는 나의 분노를 사랑하기로 했습니다. 그래도 분노가 여기저기 퍼져있는 것 보다는 하나에 모아져있는게 덜 피곤하잖아요? 너그러운 마음으로 품어주시길.



부당함을 설명하려 할 때면 항상 마음이 불편하다. 그 부당함을 굳이 설명해야하는 상황이라면 그걸 설명받는 사람은 부당하다고 느끼지 못할테니. 나는 온 힘을 다해서 그게 왜 부당한 것인지 설명할 논리를 만들고, 그러면서도 그 부당함을 넘어서는 야비한 짓은 하지 말아야하고 여간 에너지가 많이 드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그냥 감내하기엔 분노가 나를 잡아삼킬 것 같고. 그래야만 할 때에는 이런 생각이 나를 괴롭힌다: '내가 받은—혹은 목격한— 부당함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나는 어떠한 책임도 없는가?' '그 부당함이 나에게 돌진하기 전에 내가 능동적으로 피할 수는 없었나?' 그런 질문들이 내 머릿속을 헤집어놓으면 나는 머릿속에 피할 수 있었을 대체우주들을 수없이 많이 만들어낸다. 이런 방어기제가 나에게 실용적인 도움을 주지 않는다고 느끼면서도 그 때 그랬다면. 그 때 오지는 회피기동으로 피했다면. 아무래도 현실을 인정하고싶지 않아 수많은 대체우주를 만들며 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찾아올 때를 대비하는 것 같지만. 때때로 상황을 즉시 받아들이고 해결을 우선하는 사고하는 자를 발견할 때 마다 놀랍긴하다. 아프지도 않은가.


안 될 방법을 찾지 말고 될 방법을 찾으라는 구호를 외치면 그 사람이 능동적이고 생산적으로 보이는 착각을 주지만 큰 함정이 있다. 그 구호는 구성원의 논리 수준이 평형일 때에나 설득을 가진다. 누군가 될 방법이라고 내놓은 안이 사실은 너무나 안 될 방법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것이 왜 안되는지를 설명할 기회를 박탈당한다. 안 될 방법을 설명하지 말고 될 대안을 찾으라고 한다면 그 대안을 제시했을 때 그게 될 대안이라는 것을 알아챌 사람이 있어야한다. 그런 구호를 외치기 전에 모두가 한 비행기에 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한다. 안 될 이유를 외치는 것은 만 피트 상공에서 비상문 열면 나까지 죽기 때문이다. 죽는게 문제면 낙하산을 매면 된다는 해결책을 제시하는건 누구에게도 도움되지 않는다. 비상구를 대체 왜 여냐고. 지식의 저주는 여기에도 있다. 만 피트 상공의 비행기에서는 낙하산이 아닌 안전벨트를 매고 얌전히 앉아있는게 가장 좋은 방법인데 비상문을 어떻게하면 잘 열까를 고민하면서 안된다 말고 된다를 가져오라하면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인 것이다. 내가 승객의 마인드가 아니라 파일럿의 마인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파일럿은 비상문 어떻게 열지 고민 안 하고 열어야 될 때 알아서 연다.


기술 존중이 없는 SF는 얼마나 공허한가. 조그만한 단추를 관자놀이에 붙이는 것만으로 컴퓨터와 뇌신경이 페어링되어 가상현실로 들어가고, 부주의한 엔지니어가 마시던 커피를 컴퓨터에 쏟아버려서 관자놀이에 단추 붙인 사람의 의식이 컴퓨터에 갇혀 혼수상태에 빠질 지경이 되었지만 컴퓨터에 갇힌 그 의식은 그걸 알면서도 NPC 구하겠다고 갇혀 죽는걸 선택하는 얘기가 시바 말이 돼? 근데 관자놀이에 붙인 단추를 떼는 건 무슨 뭔 이유로 98% 확률로 죽어버린대. 멍청한 기술이 고귀한 창작의 도구로 쓰이는걸 보고있자니 고문이 따로 없다. 블랙미러 정주행하다가 기분이 팍 상해부럿으


너무나 거대하게 느껴지는 일들이 종종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일들에 좌절하고, 어떤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고, 어떤 사람들은 타인이 대신 부딛히도록 유도한다. 나는 그저 내 조그만 몸이 짓눌리지 않게 피하며 혹여 놓쳐버릴까 불안한 희망을 꽉 쥐고 기다린다.


5월 2일 오전 8시

"근데 저거 네가 올려뒀어? 저거 계란후라이"

"응? 아 저거 내가 올려둔건 아닌데 그냥 둬. 저거 계란후라이 아니고 수플레..." 나는 약불이 켜진 팬 6개에 수플레 반죽을 올려둔 사람을 찾기 위해 거실로 나가면서 뒤를 돌아봤다.

W는 그 반죽을 뭉개 계란후라이를 만들었다.

"혹시 수플레 굽고 계신 분?"

"아! 제가 올려뒀어요!" V는 나를 보고 반가운 웃음을 지었다.

"미안해요. 이제 계란후라이가 됐어요." V는 아랑곳않고 반가워했다. V가 살이 좀 쪘나...? 나는 V가 그다지 반갑진 않았다. 나는 사실 이 때의 V가 그냥 살 찐 게 아니라 임신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선뜻 축하를 건네는 게 실례일까 봐 말하지 않았다.

"미안해요. 지금이 몇년도죠?" 나는 지금의 타임라인에 속해있지 않다.

"2017년이에요."

2017년이라고? 그렇다면 V도 이 시간선의 사람이 아니다.

"응. 그렇구나. 지금의 V는... 이런 상태군요."

"네 맞아요." V는 나를 여전히 반가워하는 얼굴로 나를 대했다.

"미안해요. 뭔가 하실 말이 있다면 다음에 한번 더 하셔야겠어요. 제가 이 시간선의 제가 아니라." 나는 계란후라이가 된 수플레를 먹는 W와 Q를 봤다.

"괜찮아요. 그냥..." V도 내가 이 시간선에 속해있지 않다는 것 쯤 알고 있었다.

"축하해요." 둘째인지 셋째인지 넷째와 다섯째 쌍둥이인지는 묻지 않았다. 첫째가 아니란 것만 알았다.


나의 분노는 타인에 대한 존중이 없음을 발견할 때 뿜어져나온다. 타인은 다른 개체이며 그 사고 회로는 무수히 많은 종류가 있다는 얘기를 종종 하게 되는건 성장과정에서 그걸 존중받은 경험을 쌓지 못한것에 큰 영향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 생각을 알기 위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은 채 모든 것을 다 안다는 태도를 마주칠 때 마다 내 깊은 곳에서 분노가 솟아오른다. 타인이 그런 상황을 겪는 것을 내 예민함이 감지할 때에도 마치 내가 그런 상황을 마주한 것 같은 분노가 샘솟는다. 생각이 서로 다른 것은 오히려 생각이 같은 것 보다 자연스럽다. 그러나 사고 회로가 다를 수 있다는것을 이해하지 못하는걸 보면 혈압올라. 그런 분노는 속으로 삼킨다. 이것이 내 심연이기 때문이며 그런 분노유발자는 내가 왜 분노하는지조차 이해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을 마주할 때 마다 다른 긍정적인 감정과 해결책을 꺼내 분노를 덮어 가리는 게 익숙해졌지만. 8월의 나는 이걸 일기장에라도 털어놓아야 한다.


제 글이 여러분을 지치게 만든건 아닌지 걱정됩니다. 힝 그럴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만약 제 글이 여러분의 일부를 소진시켰다면 꼭 연락주세요. 약소하지만 아이스 아메리카노 쿠폰이라도 드릴테니 그걸로 조금이라도 채우시기 바랍니다. 이런 부정적인 감정들이 저를 이루는 모든것도 아니지만 굳이 감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런데 모아놓고 보니 웬 분조장 하나 있는 것 같네요. 8월만의 생각은 아니고 몇년치 메모를 긁어모았으니 분노 특집이라고 생각해주시길. 제 부정적인 감정을 마주해주신 여러분의 너그러움에 감사합니다.

입추가 지났지만 저는 아직 에어컨이 필요해요. 더운 시기가 끝나기 전에 수박을 많이 드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