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월간 치치
요즘엔 평소보다 많이 메모하고 있습니다. 잠에서 깨어 꿈을 기록하기도 하고 어떤 문장이 떠오르면 그 문장을 기록하기도 합니다. 픽션의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것도 메모해두고요. 월간 치치를 쓰며 한달을 돌아볼 땐 그 메모들을 꺼내봅니다. 이번달에는 메모가 늘어 언제 어떻게 쓴건지 기억나지 않는 문장이 몇가지 발견되었는데 그런 문장 중 하나를 시작 글로 넣었습니다.
나는 그녀를 통해 사랑이 뻗어나가는 일을 봤다.
유튜브가 홈 탭에 추천한 영상에 '회사는 친구 사귀는 곳이 아닙니다'라는 썸네일이 눈에 띄었다. 나는 회사에서 만난 좋은 친구들이 많기 때문에 어떤 이유로 그런 이야길 하는지 궁금해졌다. 대개 이런 주장들은 그 주장만 놓고 보면 자명해서 그냥 받아들이게 된다. 카페는 똥싸는 곳이 아닙니다. 자동차는 운전하는 도구입니다. 맞는 말인데 아무도 카페를 똥싸는 곳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커피 한 잔 마시러 가서 화장실 쓰면 안 되는가? 운전을 하면서 라디오 들으면 안 되는가? 회사에서 친구를 만들면 안 되는가? 영상을 보면서는 내가 생각하지 못한 어떤 이유가 있길 내심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대부분의 이유는 사회 초년생들에게 학교와 회사의 집단 특성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같은 논리로 학교는 친구 사귀는 곳이 아니고 공부하는 곳이라는 주장을 할 수 있지만. 풀타임 근무를 하면 시간의 대부분을 침대와 회사에서 보낸다. 그러니 회사에서 친구가 생기는건 자연스럽다. 친구를 사귀는 것이 주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친구가 될 확률이 높다. 학교에서 친구 되는 게 자연스러운 것 처럼. 아주 긴 시간을 서로 함께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는 것이다.
요즘에는 영화관에 자주 가서 좋습니다. 보통 평일 점심 조금 넘어서 가는데 영화관 가는 지하철에도 영화관에도 그 시간에 사람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빌런은 스크린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내 옆자리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중년 부부는 영화보는 내내 대화를 하는가 하면 어떤 중년은 모든 대사에 "허허" 하며 리액션을 합니다. 어떤 청년은 바스락거리는 과자봉지에서 바삭거리는 과자를 꺼내먹고요. 어떤 청년은 전화를 꺼내 메시지를 보냅니다.
왜 이런 사람들이 있을까를 생각해보다가 문득 내가 기준을 높게 잡고있진 않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와 타인의 쾌적한 영화 관람을 위해서 응당 하지 말아야 하는 행동들이 그들에겐 어떤 기준 없이 평소에 하던 것들을 영화를 본다고 해서 다른 기준을 딱히 적용하지 않는 게 아닐까 하고요. 저는 상영 중간에 화장실에 가는 사람들에겐 별 생각이 없으니 그 기준도 사람마다 다른 것 같습니다.
높은 스탠다드를 가지는 일은 문제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잠시 머물던 친척집에서 모종의 이유로 야심한 밤에 쫓겨난 나는 내 동생들을 데리고나와 편의점에 갔다. 버스는 이미 끊겼고 택시가 이 시간에 금방 잡힐리 없었다. 칠흑같은 어둠 속 밝게 빛나는 등은 편의점이 유일했다. 왜인지 셋째는 편의점에 들어가기 두려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내 옷깃을 잡았고 둘째는 힘차게 발을 내딛었다. 몇 안되는 계단을 오르는 둘째가 헛딛어 넘어질 뻔 했고 나는 둘째 앞으로 재빠르게 손을 뻗어 코가 깨질 뻔 한 것을 막은 뒤 대신 내 어깨를 접질렀다.
둘째는 대길을 타고나서 흉을 조금이라도 가진 날이면 내 운을 조금 떼어가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난 것을 탓할 수는 없지만 오늘같은 날이면 얄미울 때가 있었다.
천진하게 웃으며 편의점에 들어가는 둘째와 막내를 보며 어깨죽지의 통증에 서러움이 밀려왔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한참 동안이나 받지 않다가 연결이 끊어질 때 즈음 받아 또 한동안이나 전화를 옆에 두고 다른 사람과 말을 나눴다. 나는 몇번이고 엄마를 부르다가 답답한 마음에 소리를 치는 지경이 됐다.
"엄마!!!"
그냥 끊어버릴까 생각했지만 이 상황에서 의지할 것이 엄마와의 통화밖에 없어서 그러지 못했다. 그 때 엄마가 말했다.
"왜 이렇게 소리를 질러? 다 들린다. 왜?"
"엄마 지금 어디에요?"
"엄마 잠깐 프랑스에 있어. 저번에 봤던 감자튀김 집이 계속 생각나서 먹으러 왔는데. 선우는 뭐 하고 있니?"
"감자튀김... 감자튀김이 생각나서 프랑스에 가셨다고요? 그럼 저는 어떡해요."
나는 엄마가 데리러 오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자 눈물이 고였다. 동생들이 어디 밖에 가지 않고 얌전히 편의점에 있는 것을 곁눈질로 확인하고서는 맘놓고 엉엉 울 수 있었다.
그 때 잠깐 따뜻한 노란 빛이 골목으로 빠르게 다가오더니 그 곳에서 엄마가 나타나 나를 안아주었다. 손에는 막 튀긴 감자튀김이 네 명 먹을만큼 들려있었다.
모기는 여전히 저를 괴롭히고요. 훈증기 하나 샀습니다. 날이 추워졌는데 감기 걸려도 조금만 아프고 빨리 낫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