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
평소보다 눈이 일찍 떠진 날이었어요. 또렷이 말짱한 정신에 두 시간 일찍 출근길에 나섰습니다. 일찍 나선 출근길은 평소보다 조용했어요. 한산한 거리에서 그녀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서리라고 소개했습니다. 날이 추우면 하얗게 얼어붙는 얼음 꽃이라는 뜻이라나요. 그녀는 제게 커피 한 잔 사달라고 했습니다. 출근까지 두 시간이나 일찍 나온 저는 뭐 그래 그러기로 했습니다.
서리는 커피를 처음 마신다고 했습니다. 서리는 한껏 부푼 표정으로 커피를 받아들고 천천히 한 모금 마셨습니다. 그러곤 찡그리며 이게 커피가 맞냐고 재차 물었습니다. 그녀가 상상한 커피는 행복에 젖어드는 맛이었다나요. 아무래도 커피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해 보였습니다.
서리는 자신이 15세대 후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서리가 온 곳에는 커피가 실험실에서만 아주 조금 나온다고 했습니다. 서리가 온 곳에는 더 이상 서리가 없다고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요.
서리는 자신의 과거, 저의 미래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자신의 미래에 대해 말했습니다. 지금부터 15세대 후에는, 분명 여전히 커피를 마실 수 있다고요. 서리는 그러기 위해 왔다고 했습니다.
서리는 저를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15세대 후에도 커피와 서리가 있기 위해서는 제가 필요하다고요. 저는 제가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냐고 물었고, 서리는 웃으며 모두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저는 왜 나를 찾아왔냐고 물었고, 서리는 커피를 사주었기 때문이라고 답했습니다.
저는 무얼 하면 되느냐고 물었고, 서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다만 제가 저이기만 하면 된다고요. 서리는 이 곳에서 일곱 번의 낮과 일곱 번의 밤을 지냈다고 했습니다. 자기는 그저 이 곳에 와서 커피를 사 줄 사람을 찾았고, 그러면 분명 그 사람이 15세대 후에 커피와 서리를 안겨줄 사람이라고요.
서리는 제가 낯선 이웃에게 베푼 커피 한 잔이 그 이웃의 이웃에게 포도를, 또 그 이웃의 이웃에게 서리를, 그 이웃의 이웃에게 서리가 앉을 땅을, 수 많은 종의 번영과 안녕을 가져다 준다고 했습니다. 15세대 후의 커피와 서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저 낯선 이에게 커피를 베푸는 것이 시작이라고요.
'서리'는 200세대 전의 인류는 단지 현재 인구의 0.5%에 불과했다는 점에서 인구과잉과 그에 따른 종말이 생각보다 가까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 시작됐습니다. 산업혁명은 약 200년, 인터넷의 등장은 불과 50년, 아이폰은 출시된 지 15년 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서리가 온 15세대 후의 미래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지만 충분히 예측 불가능한 급격한 발전을 이룬 세상으로 설정했습니다. 과거로 사람을 보낼만큼 기술이 발전했지만 동시에 온난화로 인해 커피가 자라지 못하고, 서리가 내려앉을만큼 추운 지역이 드문 세계로요.
종말을 막을 방법으로는 엄청난 능력을 가진 영웅이 아닌 커피 한잔 베풀 여유가 있는 평범한 인물을 설정했습니다. 지역 사회에 작은 애정을 가진 인물이 작은 연쇄 애정을 일으키고 이 작은 연쇄 애정이 15세대에 걸쳐 증폭돼서 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상상했습니다.
이번엔 적어도 단편이나 중편 연재를 생각했지만 글 쓰는게 어려워진 관계로 토막 글로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