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디톡스 효과에 대하여

2020.04.16

훈련소에서 쓴 편지

1

디지털 기기 사용이 제한되어 손목시계를 차고 있는데, 생각보다 이 경험이 나쁘지 않습니다. 역설적으로 하이테크 모바일 시계를 하나 사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2

어떤 전자음악도 들을 수 없습니다 (아니 사실 모든 음악이지만). 그랬더니 내 귀가 잘못된 것인가? (검열삭제) 곡이 엄청나게 좋게 들리더라고요. 랩이 나오기 전까지만요.

3

슬랙 알림이 그립습니다. 특히나 저는 #guild-chainsmokers의 모든 메시지를 모바일 푸시로 수신하는데요. 그 동안 몇 개의 메시지가 왔는지 세어보려고요.

4

종이에 적는 활자량이 압도적으로 많아졌습니다. 저는 지금 평일엔 1000자, 주말엔 5000자를 필기하고 있습니다. 이 것은 소비할 수 있는 콘텐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디지털 매체가 없으면 딱히 시간을 보낼 방법이 없습니다.

5

물리적인 신체활동이 많아졌습니다. 디지털 활동에 쓰는 시간이 없다보니 제가 그동안 쓰지 못 했던 근육들—직립보행에 필요한 근육이나 물건을 드는 데 쓰이는 근육—이 발달하는 느낌이 듭니다. 어떻게 아냐고요? 온몸 근육이 아프거든요.

6

15년 전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시간 약속은 철저했을 것 같아요. 늦으면 늦는다고 알릴 수단이 없으니까요. 갑자기 배아파서 30분 늦는다면? 기다리는 사람은 꼼짝없이 30분 기다리겠죠. 교통사고가 나서 3일간 연락이 안 된다면? 사실 우리는 이제 연결되지 않고는 살 수 없게 된건지도 모릅니다. 커피 맛을 알아버리면 다시는 커피 없인 살 수 없게 되는 것 처럼요.

7

사실 저는 디지털 디톡스를 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자발적으로 디지털 디톡스를 해야 하는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7-A: 본인이 거대 소셜미디어 창업자인 경우

정보통신 사업자 특성상 인건비만을 태워가며 단숨에 수조원짜리 거대 소셜미디어 제국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혹은 경쟁 소셜미디어를 오버밸류에 사서 그만한 시너지를 만들던가요.) 그 성장 속도가 본인도 감당이 안 된 겁니다. 그래서 현타와서 디지털 디톡스(를 핑계로 주주들 연락 무시하기).

7-B: 본인이 슈퍼핵인싸인 경우

소셜미디어에서 발행하는 푸시메시지가 감당이 안 될 정도입니다. 그 중 대다수는 스스로 알림을 꺼버릴 수 있지만, 사실은 그 많은 알림이 좋기 때문에 모든 알림을 구독하고 자발적으로 알림 홍수에 빠져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허울뿐인 인터넷 관계에 현타를 느끼고 디지털 디톡스(를 가장해 인스타 업로드용 사진 출사)

7-C: 본인이 슈퍼핵아싸인 경우 (치치 해당)

하루종일—말 그대로 잠에서 깬 뒤 부터 잠들기 전까지—소셜 알림을 확인하지만 확인할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쩌다 휴대폰이 울리면 어김없이 1. 티몬 타임세일 2. 쿠팡 타겟푸시 3. 강남언니 이벤트 중 하나입니다. 현타를 느끼고 디지털 디톡스(다시 디지털 복귀할 땐 내심 기대하며 휴대폰을 켜지만 그동안 받은 푸시의 95%가 쿠팡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