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쌤
종종 "너는 그걸 어떻게 알아?" 하는 질문을 받는다. 차에 관한 잡담을 하다가 수동변속기와 자동변속기가 어떻게 다른지, 디젤 엔진과 가솔린 엔진의 차이를, 혼유 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같은 얘기를 하다가 너는 면허도 없는데 그걸 왜 알고 있냐는 식으로. 한글 자음 표기 받침에는 그 자음이 들어간다던가, 발명왕 에디슨이 사실 발명왕이 아니고 테슬라와 싸웠다던가, 스위치를 켜면 전등이 바로 켜지지만 사실 전자는 매우 느리게 움직인다던가, 100%는 존재하지 않는다던가. 뭐 그런 잡담거리 하기 좋은 얕은 사실을 꺼낼 때에 그렇다. 그런 질문을 받으면 내가 어떻게 안 게 왜 궁금한지에 대한 의문과 그러게 내가 이걸 어떻게 알게 되었나 기억의 기원을 찾다가 대답할 타이밍을 놓쳐버리기 전에 "몰라 그냥 알아" 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기억의 끝을 더듬으면 항상 R쌤이 있었다.
친구들은 그를 R쌤이라고 불렀다. "너 내기할래? 누가 맞는지 R쌤한테 물어볼까?" "R쌤, 떡볶이 사주세요." "R쌤, 오늘 그냥 놀아요." 내 정신이 이제 막 섞은 쿠키 도우처럼 반죽되기 시작하던 쯤에 그 시절의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이유로 더이상 R쌤과는 볼 일이 없어졌으므로 그가 어떤 배경을 가졌는지 이젠 알 방법이 없지만 그가 학문적인 배움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제자에게 관대했다는 것은 내 기억에 또렷하다.
최근 몇 년간, 질문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구호는 잦아들고 그 자리를 AI에게 질문 잘 하는 방법론이 꿰찼다. 나는 개인의 역량보다 환경이 더 중요하며 환경이 조성되지 않은 개인은 역량을 발휘할 수 없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관점에서 '질문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구호는 개인을 '질문하는 승리자'와 '질문하지 않는 패배자'로 나누며 이는 결국 전체에서 질문하는 사람의 비율을 한정하고 그러지 못한 사람을 배제한다. 질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질문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이다. 그러니 진정 질문하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는 질문하지 않는 자를 보채는 대신 어떤 반응이 좋은 반응인지를 더 고민해야한다. AI 구독료를 두려워 하는 사람은 있어도 AI에 질문하는 것을 두려워 하는 사람은 없다. AI는 모든 질문에—심지어 모르는 것에도— 적절한 반응을 내놓기 때문이다.
나의 유년시절 R쌤이 그랬다. 두개골에 쿠키도우가 든 내가 질문을 하면 R쌤은 답을 내놓는 자판기처럼 명쾌히 답하고 함께 추론했다. 모르거나 추론하기 어려운 질문은 모르겠다며 다음에 알려주겠다 했고 그 약속은 항상 지켜졌다. 산업혁명은 증기기관으로, 증기기관은 석탄발전소로, 석탄발전소는 원자력 질문으로 이어졌다. 원자가 깨질 때 나오는 에너지가 어마어마하고 원자폭탄도 그런 원리라는 설명에 나는 책상을 힘껏 짓이기기 시작했고 R쌤은 그런 나를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빨리 도망가세요. 제가 원자를 깰 거거든요" 했고 R쌤은 푸하하 웃었다. 나의 쿠키도우에 박혀있는 수많은 청크들은 R쌤을 비롯한 헌신적이고 포용적인 답변자들로부터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