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생일에 대하여
2020년 생일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4번의 생일에 펀딩을 열었다. (숫자가 부족한 건 건너뛴 해가 있기 때문이다.)
첫번째 펀딩은 페이스북이 내게 띄운 코로나 백신 펀드레이징을 열어보라는 넛지 배너를 발견하면서 시작됐다. 하필이면 넛지배너에 뜬 후원처가 백신 연구를 지원하는 빌앤멀린다게이츠재단이었고, 당시 나는 '잡스' 신화보단 '게이츠' 신화에 푹 빠져있던데다 당시엔 코비드19 백신이 개발되기 전이라서 실체적인 공포를 헷지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생일펀딩을 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 덕에 페이스북은 플랫폼 내 결제경험을 퍼트렸고 나는 함께 기부하는 경험을 선물받았으며 생일이 내 생각보다 힘이 세다는 걸 알게 되었다.
두번째 펀딩부터는 생일선물 대신 기부를 해주시면 내가 그만큼을 더 기부하는 1+1 기부 캠페인을 열었다. 펀딩을 종료하고나서는 참여자에 대한 크레딧이 더 크게 필요하다는 아쉬움이 들어서 세번째와 네번째 생일 펀딩에서는 랜딩페이지와 소셜에 같이 기부해주신 분들에 대한 감사함과 크레딧을 녹이는 방법을 시도했다.
그렇게 생일 캠페인으로 함께 기부한 금액이 누적 500만원을 넘기는 동안 마음 한 켠에선 내가 왜 여러분과 함께 기부를 하고자 하는지를 설명하고 싶은 욕구가 꿈틀거렸지만 그게 자칫 함께 기부해주신 분들의 뜻을 왜곡하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매년 머뭇거리다가 이제서야 그 마음을 털어놓는다.
나는 온갖 운을 딛고 서있다.
중학교 1학년, 주에 1시간 있던 컴퓨터 시간은 대부분의 친구들에겐 피카츄배구 하는 시간이었지만, 나와 준×에게는 아니었다. HTML 문법을 배우는 수업이었는데, 준×은 웹게임의 일종인 '미궁'이라는 HTML 기반 퍼즐 게임을 내게 알려주었고, 그 게임의 퀄리티가 방금 전 수업에서 내가 만든 문서와 별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나와 준×은 피카츄배구 대신 서로의 HTML 퍼즐게임을 만들고 풀었다. 그걸 인터넷에 올리려면 어떡해야 하는지, 정답을 파일명으로 탐색하는 대신 입력창에 입력하려면 어떡해야 하는지를 찾다보니 웹개발자가 되어있었고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는 온라인으로 외주를 받아 일하기 시작했다.
(준×아 잘 지내니?)
그땐 제미나이도 없었고 스택오버플로도 없었고 그래서 네이버 지식in에 php 질문 올리고 그랬는데, 답변으로 '내공냠냠' 달리면 질문하는 데 쓴 내공을 날렸다는 생각에 분통하고 황망해서 눈물 흘렸더랬다. 그러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서는 답변이 없는 다른 질문글에 나도 내공냠냠 다섯번 쯤 달아서 내공 벌면 다시 질문 1개 올릴 수 있고 그랬다. 그러다가 답변중에 프로그래머들 모이는 게시판 사이트가 있다고, 거기에 질문 올려달라는 답변을 발견한 뒤로는 한동안 그 사이트에만 들어갔었다.
그런데 그 곳의 자유게시판에는 적지 않은 빈도로 내 나이 40가까워지는데 이제 치킨집 해야되냐는 한탄과, 프로그래머 완전 3D 직업 아니냐고. 박봉에 야근에 이른 강제은퇴까지 겪어서 힘들다는 푸념과, 그래도 전문직인데 자긍심을 가지라는 댓글과, 의사 변호사가 전문직이지 프로그래머가 왜 전문직이냐는 대댓글이 넘쳐흘렀다. 지금도 '개발자 3D 직군' 검색하면 3D그래픽 개발이 나오는게 아니라 개발자 기피직군이라는 그 때의 그 모습들이 검색결과에 나온다.
(선배님들 지금은 행복하신가요...)
그러니까 내가 중학생 때 우연하게 흥미를 발견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 쯤에는 개발자들이 무척이나 독두꺼비같은 커뮤니티를 형성했다가, 지금에 와서는 인기직종이 되었다가, AI 발전으로 업계가 흔들리고 있는 것은 내 선택이 유효하다기 보다는 매번 거대한 흐름이 나를 통과한다고 느낀다. 비단 직업 뿐 아니라 아주 많은 것들이 나를 쓸고가는 파도처럼 느껴진다. 나는 온갖 운을 딛고 서있다. 받은 운 값 내는 거다.
세상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는 방법과도 같은 일이다. 예수님은 이웃을 사랑하라는데, 세상엔 사랑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다. 9시 뉴스는 사랑할 수 없는 온갖 소식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것만은 기꺼이 사랑하기로 했다. 사랑할 수 없는 것들을 이유로 내가 사랑할 기회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
생일펀딩은 그 사랑의 순환으로 기획했다. 사랑을 주는 일도 사랑을 받는 일 만큼이나 행복하다는 것을 기부를 통해 경험했으면 했다. 기부는 수혜자만을 위한 일이 아니다.
생일기념 일시후원을 위해 기부처 웹사이트에 접속하니, 죄책감과 동정을 자극하여 후원을 유도하는 온라인 광고가 여지없이 저를 따라다닙니다. 이런 광고를 마주칠 때 마다 제 기부의 의도가 왜곡되는 것 같아 불편하고 피곤한 감정이 듭니다. 혹여 제 공개적인 생일펀딩이 그런 피곤함을 만들진 않았나 걱정했던 마음을 이 글로 전해봅니다.
2026년 생일 기부 펀딩은 한 해 쉽니다.
2026년 2월 22일의 제 마음을 끝까지 읽어주신 것으로 생일선물은 퉁칩시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