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를 보내며
이번 글에는 올 해 즐거웠던 것들을 추리고, 생각을 적고, 짧은 픽션을 담았습니다. 어떤 게 픽션일까요. 어떤 게 경험일까요. 알아맞춰보시오.
오랜만에 미용실에 가서 시야를 가리는 머리카락을 정리하는데 선생님이 어머 새치가 많이 늘었네요 했고 나는 그런가요 했고 선생님은 쉬시는데 스트레스 받을 일은 없겠고 유전인가봐요 했고 나는 얼마전에 유전자 검사 했는데 새치 유전자가 없대요 했으며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머리카락이 많이 빠졌네요가 아닌 새치가 많이 생겼네요여서 안심했습니다.
나는 세상을 보는 각도에 따라 상이 달라진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러니 내가 보는 상과 네가 보는 상이 다른 것에 슬퍼하지 않는다. 그러나 네가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슬퍼한다.
책을 왕창 샀습니다. 산 책은 전부 SF고요. 그걸 아직 펼쳐보진 못 했습니다. 책을 못 펼쳐본 것은 잠시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어서 그럴 여유가 안 생기더랍니다. 그런데 그 정도로 일이 과중하냐 하면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상시근로자로 일할 때 보다 적게 일합니다. 그런데 일에 많은 에너지를 쓰고 나면 남은 시간에 책을 읽거나 사색하는 일은 없어지더라고요.
나는 한산한 카페에 앉아 멍때리고 있었다. 한 초등학교 3학년쯤 되어보이는 아이가 음료를 한 입 마시고는 예상한 맛이 아니었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아이는 곧 음료에 흙먼지를 집어넣었다.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의아한 마음이 들어 눈을 떼지 않았다. 아이는 음료를 맞은편에 앉은 자신의 엄마에게 내밀며
"엄마 여기 먼지가 들어있어서 못 마시겠어. 나 초코쉐이크 마실래." 했다.
아이의 엄마는 잡고있던 펜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뒤 언짢은 표정을 하며 아이가 내민 음료를 잠시 응시하고는 아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이의 엄마는 경상도 억양으로
"그럼 가서 바꿔달라 캐라" 하면서 다시 펜을 집어들었다.
아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카운터에 가서 먼지가 들어있으니 음료를 바꿔달라고 주문했다. 그러자 카운터 직원은 아이의 엄마와 내가 들을 수 있을만큼 큰 소리로 고객님이 먼지를 넣은 것을 자신이 봤으니 바꿔줄 수 없다고 했다. 아이의 엄마가 카운터로 시선을 옮겼다. 놀란 기색 없이 무표정이었다. 나는 아이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하는 것도 보았다. 아이는 수치심과 미안함 그리고 압박과 불안을 차례로 느끼며 얼어붙었다.
나는 아이가 측은하여 음료를 대신 결제해주고는 아이만 들을 수 있게
"미안한 마음이 들면 '죄송해요' 하면 돼요." 하고는 등을 토닥였다.
아이의 엄마가 이쪽으로 다가온다. 나는 그 짧은 시간에 '아이가 먹으면 안 되는 음료를 사줘서 핀잔을 들을까? 아이의 훈육을 내가 가로챈 것이 잘못되었나?'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의 엄마는 아이와 나에겐 시선도 주지 않고 직원에게 말했다. "망고 들어왔나"
"네, ㅇㅇ오빠가 먹어봤는데 엄청 달고 맛있대요." 직원이 밝고 생기넘치는 목소리로 답했다.
아이의 엄마가 앞치마를 차면서 말했다. "그라모 우리도 한번 먹어보까"
그제서 많은 것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사장님이었구나. 엄마는 아이가 거짓말 하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구나. 직원이 사장의 어린 아들에게 단호할 수 있을만큼 단단하구나. 사장은 그런 직원을 믿고 직원은 그런 사장을 믿고 있구나. 아이가 충분히 실패해도 될 만큼 안전한 공간이었구나. 그리고 이번에 들어온 망고가 달고 맛있구나...
아이의 엄마가 내게 말했다. "학생도 망고주스 한잔 하면 되겠제?"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 즐거웠던 것들을 추려봤습니다. 언제나처럼 순서는 순위와 관계 없습니다.
올해의 영화
듄: 파트2
드니 선생님에게 절로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올해의 음반
[나이트오프] ntmc
[NewJeans] Supernatural
올해의 게임
Necesse
재밌는데 컨트롤러 지원이 아쉬워요.
올해의 책
[그렉 이건] 내가 행복한 이유
그렉 이건 선생님의 단편을 모은 단편선입니다. 올해 출판된 책은 아니고 제가 올해 발견했습니다.
올해의 서비스
Cursor
올 해 가장 유용했던 AI 서비스입니다.
도미노
자산현황 보기 좋아용
안녕 여러분. 연말에는 내가 사실 지옥에 살고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지옥은 불구덩이가 아니라 '지옥은 신의 부재'나 '지옥 시즌2' 처럼 서로에게 고통을 주면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지옥이 아닌가 하는 상상입니다. 아무쪼록 그런 상황일 수록 서로에게 다정한 사람일 수 있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다정함이 어떤 폭력도 어떤 고통도 이기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