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에 대하여

감정을 잘 다룬다고 생각했다. 최근에 행복이 극을 치닫아서 그런 줄 알았다. 행복한 감정에 익숙해질 즈음 깨달았다. 아 우울해.

우울감의 원인이 어디에서 오는지 모르겠는 게 가장 큰 문제다. 그냥 우울하다.

원인을 추정하자면,

  1. 지금 잠을 안 자면 내일 못 일어날 것이고 그로인해 받을 스트레스가 예상되면서도 잠을 못 자는 것으로 인해
  2. 제대로 살고 있다고 확신할 수 없어서
  3. 내가 했던 말들이 청자를 갉아먹은 건 아닌가 불안해서

프로듀스X101을 보다가 기분이 더러워졌다. 기껏해야 고등학생 앞에 두고 너 지금 뭣 하는거냐고 꾸지람하는 걸 보고. 마이크를 잡고 부들부들 떠는 그 손을 보고 안쓰러웠다. 나는 그 애를 보고 미생의 장그래가 생각났다. 모르니까 가르쳐달라던 장그래에 성내는 오상식을 보는 것 같았다.

좆 같은 건 멘토의 태도다. 나는 진심으로 널 돕고싶은데 넌 왜 의지가 없냐는 말이 좆같다. 그렇게 돕고 싶으면 다 크지도 않은 애 떨게 만들 게 아니라 편안한 환경을 만들어주던가. 아니면 차라리 실력 떨어지니까 지금은 꺼져달라고 솔직히 말 하던지. 멘티 까내리며 멘토 본인 포장하는 것 같아 기분 더럽다.

편집하던 피디는 잠 잘 잘까? 나는 그걸 보고 잠이 안 왔는데. 편집하며 뿌듯했을까? 아니면 미안했을까?

프로듀스X101에서 잘 생긴 애가 잘 생긴 애 보고 잘 생겼다며 본인은 왜 못 생겼냐고 하는 장면 보고 기분 나빠졌다. 재수없어.

외모는 상대적으로 객관적이다. 취향의 차이는 있겠지만 예쁘고 잘 생긴건 누가 봐도 안다. 비하면 우울한 감정은 평가(evaluation)하기 힘들다. 겉을 봐선 속이 얼마나 망가져있는지 알 수 없다. 혹시 내가 우울해하면 다른사람이 재수없어할까?

힘든건 내 우울이 정상 범주인지 알 수가 없는 점이다. 다른 사람은 이런 감정을 어떤 빈도로 어떤 강도로 느끼는지 알 방법이 없잖아.

치과하는 유튜버 매직박 말하길, 미백치료를 하면 한동안 가~끔 앗 하고 시리단다. 나는 딱 그 정도로 우울하다. 아무렇지 않다가 가끔 앗 하는 정도.

평소 긍정적인 에너지를 뿜으려고 한다. 내가 부정적인 에너지를 뿜으면 주변도 부정적인 에너지에 오염된다. 이를 배제하고 좋은 영향만 미치기 위함이다. 기독교에는 선한 영향력이라는 개념이 있다. 내 말과 행동이 다른사람에게 따뜻한 감정을 유발할 때 ‘선한 영향력을 행한다’고 한다.

오, 그런데 이 글은 그러지 못했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아마 내 우울에 동화되거나 측은하거나 혹은 나를 진정 아낀다면 참담하기까지 한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았을 것이다. 미안하게 생각한다. 변명하자면 치치스페이스는 내 생각과 감정을 내 몸과 머리에서 빼내는 창구라, 이 감정을 내 몸 안에서 빼내기 위해 쓰는 글이라 생각해주길.

내 글을 누군가 봐주길 바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글을 여기저기 퍼트리진 않지만, 내게 관심을 조금만 기울이면 내 글을 읽을 수 있다. 나한텐 이 점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누군가 볼 수 있는 공간에 솔직한 내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짜릿한 일이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서 나를 드러내는 것관 다르다.

타인에겐 솔직하려고 하지만 나 자신에겐 솔직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왜 이러는지 잘 모르겠는걸.

냉장고에서 맥주를 찾았고, 유통기한 지난 맥주를 손에 쥐었다가 싱크대에 흘려보낸 뒤 밖에 나와 편의점에서 네 캔 만원하는 수입맥주를 샀다. 토마스에겐 혼자 술 마시지 말라고 했는데. 얼마나 하찮고 얕은 말이었는질 느낀다.

좋아 여러분. 이제 기분이 좀 나아졌어요. 여기까지 읽어주신 여러분께 고맙다는 말을 해야겠어요. 사랑합니다. 사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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