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월간 치치

2025.09.07

9월인데 왜 이렇게 더울까요. 9월의 월간 치치는 한 달 쉬어갑니다. 대신 짧은 소설 하나 붙입니다. 건강히 지내시지요? 건강히 지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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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 여순(에이전트)
수신: 진우(연구원)
제목: 클라이언트 요청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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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언트가 새로운 환경에서 요청합니다.

집의 먼지를 효과적으로 줄이기 위해 먼지떨이 등 청소를 하는 것과 환기나 공기청정기 등 인간노동이 개입하지 않는 것의 효율 차이가 얼마나 있는지에 대한 리포트 요청

참고로 먼지는 호흡기등에 영향을 미치는 미세먼지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먼지를 의미한다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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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에이전트가 보낸 클라이언트 요청에 회신할 리포트를 작성하기 위해 의료연구부서에 먼지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요청해두고 인터넷에서 청소제품과 가전제품을 검색해 상세페이지를 꼼꼼히 읽으며 먼지제거에 효과적이라는 설명이 있는지 찾았다. 클라이언트가 요청한 공기청정기 제품은 20개나 찾아 더 꼼꼼히 읽었지만 먼지에 대한 내용이 없는 제품이 태반이었고 있어도 미세먼지에 관한 내용만 있었다. 그러고 있으니 의료연구부서에서 보내온 먼지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메일이 와 있었는데 여기에도 반 정도는 미세먼지가 유발하는 질병이라 이 내용은 지우고 위생과 청결 관점의 내용만을 따로 발췌했다. 검색한 내용과 발췌한 내용을 정리해 반 페이지짜리 PDF 문서를 만들어 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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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 진우(연구원)
수신: 여순(에이전트)
제목: Re: 클라이언트 요청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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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먼지.pdf`

주기적으로 집을 청소하고 환기와 공기청정기 작동을 병행하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공기청정기 제품마다 성능이 달라서 그러는데 혹시 집의 크기가 어떻게 되나요? 복층 여부도 알려주시면 더 자세히 조사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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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일을 보내고 시계를 보니 5분만 있으면 점심시간이었다. 별안간 부장이 손을 높이 들어 박수를 두번 쳐서 팀원들을 주목시켰다. 부장은 낯선 얼굴을 왼편에 두고 들떠서는 이번에 수학 잘 하는 신입이 들어왔다며 그 낯선 얼굴이 얼마나 뛰어난 인재인지 침을 튀겨가며 쩌렁쩌렁 옆 부서까지 들리게 소개했고 신입은 고개를 꼿꼿이 들고 부끄러운 기색 없이 당당한 무표정이었다. 부장은 호들갑이 성에 안 찼는지, 에이전트가 내 책상에 두고 간 서류뭉치에서 한 장을 빼 거기에 적힌 행렬을 읊기 시작했다. 동시에 신입은 이따금 손가락을 굽혔다 폈다 하고 눈알을 위아래로 왔다갔다 굴렸다. 부장이 마지막 숫자를 읊자 이번엔 신입이 즉시 계산한 값을 읊기 시작했다.

"봤지? 봤어? 내가 살면서 이렇게 계산 빠른 친구 처음 본다니까?" 부장이 앞으로 계산 필요한 일 있으면 저 친구 시키라고 지시하며 내 어깨를 툭 쳤다. 부장의 손 끝에서 서류가 힘없이 떨어져나와 내 책상 위에 사뿐히 앉았다. 부장은 신입의 어깨 위에 팔을 걸치고 함께 로비로 나갔다. 나는 부장이 아무렇게나 내려놓은 서류를 서류뭉치의 올바른 위치에 끼워넣었다.

점심을 대충 때우고 오후 업무를 시작했다. 에이전트에게 답신이 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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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 여순(에이전트)
수신: 진우(연구원)
제목: Re: Re:클라이언트 요청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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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크기는 15평 원룸이라고 합니다. 클라이언트께서 직접 청소를 하는 것과 인간노동력 개입 없는 다른 방법들의 청소 효율 차이에 대해 구체적인 수치를 알려달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정확할 필요 없으니 제공되지 않은 다른 정보는 가정해서 알려줘도 좋다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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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클라이언트가 제공한 정보와 가능한 선택지들을 상상하며 여러 수치를 구했다. 공기청정기를 가격대별로 3개 선정해 정화능력을 가정하고, 가구 밀도를 널널한 것과 빽빽한 것, 먼지털이와 청소기로 대충 청소했을 때와 열정적으로 청소했을 때 먼지가 얼마나 감소하는지를 가정했다. 가정들을 신입에게 전달하고 계산을 부탁했다. 신입이 아무 말 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길래 이해를 못 했나 싶어 다시 설명하려던 차에 신입의 입에서 숫자 몇 개가 나왔다. 나는 그 숫자를 받아적은 뒤 신입이 준 숫자가 어떤 것을 계산한 것인지, 그 계산은 맞는지 검산을 하기 시작했다. 부장이 파티션 너머로 그걸 지켜보다가 신입이 일 얼마나 잘하는지 또 자랑을 늘어놓고 싶었는지 입꼬리를 씰룩대며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어때, 신입 들어오니까 일 많이 편해졌지?'

"네 뭐..."

"근데 뭐 하는거야?"

"아, 신입이 계산해준 것 확인하고 있었어요."

부장은 잠시 생각하더니 나를 빈 회의실로 이끌었다.

"진우씨, 주도적으로 일 하는건 좋은데 너무 혼자 다 하려고 하지 마. 계산은 계산 잘 하는 사람한테 맡기는게 좋지 않겠어? 리더가 되려면 사람 쓸 줄 알아야 해. 내가 진우씨 좋게 보고 있는 거 알지? 이번 인사평가에서 내가 진우씨 팀장 진급 추천할거야. 근데 진우씨가 계산을 다시 할거면 신입이 빨리 계산해준 게 우리 팀의 속도를 높이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늦추는..."

나는 '주도적으로 일 하는건 좋은데'와 '그 뒷 내용'이 어떻게 생각하면 양립할 수 있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하느라 '그 뒷 내용의 뒷 내용'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인사평가 볼모로 잡아 뇌 빼고 시키는 거 하라는 말이었다.

"네 부장님 하신 말씀 잘 이해했습니다. 빠르게 많은 일 하는 게 우리 부서에도 좋으니까요."

"그래. 영업이랑 마케팅 부서에서 이번에 우리회사 세일포인트 '빠른 속도'로 잡은 거 진우씨도 알지? 우리 부서 다 같이 잘 되고 싶어서 하는 말이야."

그래도 그 숫자를 내가 검산하다가 한소리 들은게 다행이었다. 그걸 원래 하던대로 옆 부서에 보내 교차검증 했다면 이정도로 끝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진우 씨, 부장이 뭐래?" 동기 세진 씨였다.

"그냥 뭐... 뭐 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받아다 리포트 쓰라는 의미인 것 같은데. 잘 이해한건지는 모르겠어."

"그러려니 해. 왜, 이번에 정부에서 공공연구다 뭐다 해서 전기 많이 끌어다 쓰는 거 알지?"

모르겠다는 제스쳐를 했다. 그런 소문은 또 어떻게 아는지도 모르겠고 그걸 지금 왜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세진씨는 아랑곳 않고 계속 말했다.

"그래서 전기가 많이 모자란가 봐. 우리 경쟁사는 전용 SMR도 짓는대."

"전기가 왜?"

"진우 씨. 농담해? 요즘 회사 여기저기에서 빨리빨리빨리 소리 들리는 게 다 전기 없어서잖아. 부장이 진우씨한테 생각하지말고 그냥 받아다 쓰라는 것도 전기 낭비하지 말라는 거지. 나는 요즘이 오히려 편해. 에이전트가 가져다 준 거 대충 잘라다가 여기저기 담당자한테 던지고 받은거 다시 에이전트한테 갖다주거든. 예전 같았으면 한 땀 한 땀 내가 봐야하는데. 어우 나는 다시 그렇게 일 하라면 못 하겠다."

"틀릴까봐 불안하진 않아?"

"에이 리포트에 내 이름 써있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 그리고 솔직히 진우 씨도 아까 신입 숫자 읊는 거 봤잖아. 진우 씨가 그거 하려면 한참 걸릴 걸?"

세진 씨 말이 맞았다. 이번에 각 부서에 들어온 신입들은 각자 맡은 분야에 대해선 이 회사의 누구도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자신의 업무가 아닌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어딘가 망가져있었지만. 그건 내가 세진 씨 처럼 적절한 부서를 찾아 일을 나눠 주면 해결되는 문제였다.

하지만 나는 내가 스스로 생각할 때 살아있는 느낌을 받았고, 그게 좋았다. 우리 회사도 SMR을 지을까? 우리 회사에 독점으로 전기를 공급하는 SMR이 있다면 내게도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질까? 그저 앵무새처럼 받아쓰는 것을 넘어 다시 나만의 생각을 가질 수 있을까? 내가 다시 살아있을 수 있을까?

"나는... 에휴 모르겠다. 들어가자. 하라는대로 빨리빨리빨리 해야지 뭐."

dust